[투민] 개새끼 09 完 3_ 개새끼





어릴 때, 신발의 왼쪽 오른쪽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밖으로 나갈 적이면 언제나 부리나케 뒤따라 온 형이 내 머리를 쥐어박고 똑바로 신발을 고쳐 신겨줬다. 늘 그랬다. 나는 언제나 꼭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곤 했었다. 진실과 거짓이라던가, 받아들여야하는 진심과 외면해야하는 진심 같은 것을.


“이태민‥”

민호가 손에 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깨부터 팔목까지 감싼 커다란 깁스가 여실히 보였다. 태민은 저도 모르게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멋대로 다치고 그래. 짜증나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태민은 한 걸음 한 걸음 민호에게 다가갔다. 민호의 등 뒤로 가습기가 쉼 없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야, 최민호.”

입에 담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해 오는 이름을 불렀다.

“네가 그랬지, 매일 생각나서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으면‥”
“…….”
“그건, 좋아하는 거라고.”

아닐 거라고, 나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조금 더 민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어떻게 좀 해 봐.”

순간 태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사실은,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말이다. 네가 보고 싶어서 멍청하게 안달이 났던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려고 했는데 말이다. 꾹 참았는데. 혼자 타이르고 타일렀는데….


“자꾸 네가 생각나. 미칠 것 같아.”
“…….”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날 좀‥”

태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민호가 성한 오른쪽 팔로 태민을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코끝을 찌르던 병원냄새는 사라지고 익숙한 향이 폐부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때서야 기다렸다는 듯 태민의 눈에서 쉼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가가 따뜻하다. 가슴이 따뜻하다. 네 품이 참, 따뜻하다‥

“하아‥”

목까지 차오른 젖은 숨을 내뱉으며 태민은 민호의 하얀 병원 복 자락을 꽉 붙잡았다. 놓치고 놓쳤던 그 옷자락을 다시, 다시금 손에 쥐었다. 이제는 다시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부서져라.


“좋아해. 좋아해 이태민. 나 널 많이 좋아해.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흐으.. 흡”

뭐가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뭐가 이렇게 서러워 우는지, 태민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쉼 없이 흐르는 눈물에 눈가가 따끔거렸다. 자꾸만 귀를 울리는 민호의 목소리 때문일까. 코끝을 맴도는 민호의 냄새 때문일까. 아니면, 다시금 붙잡은 것이 민호의 옷자락이기 때문일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시작 돼서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온 마음을 물들여 버린 걸까.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좋아해.”

너를 좋아하게 된 걸까.

“좋아해 최민호.”

너를. 아주 많이.




개새끼 09
sambackwon





우리는 겨우 이 한 걸음을 내딛는 데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좋아해’ 이 한 마디를 말하기가 겁이 나서, 무섭고 두려워서, 진실을 감싸고 포장해 등 뒤에 감추고 계속해서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빙글빙글 끝도 없는 궤도를 걷다가, 겨우‥ 겨우. 이렇게 너에게 닿았다. 너의 손을 잡았다. 함께 뛰고 있는 심장 소릴 들을 수 있다. 맞닿은 어깨로 따뜻한 서로의 체온을 공유할 수 있다. 마주 볼 수 있고, 함께 같은 곳을 볼 수 있다. 혼자가 아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마주한 채로 병원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불을 키지 않아 어두운 병실로 넓은 창을 통해 달빛이 스며들었다. 한참 전부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오로지 함께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두 눈을 깜박이며 숨을 들이쉴 뿐이었다. 민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 앉은 태민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이 반짝였다. 이상하게, 이상할 만큼 반짝였다.

모든 것이 꿈인 듯 했다.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 자체가 그저 꿈에서만 이루어지던 일이었으니까. 최민호와 이태민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말이다. 숨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만일까, 가까이서 태민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민호는 조용히 다가가 태민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숨소리가 더 잘 들린다. 심장소리도.


“이태민”
“…….”
“이태민”
“..응.”

민호의 목소리가 한층 가깝게 태민의 귓가를 울렸다. 목소리만 들려도 이렇게 가슴이 저린데, 왜 우린 이렇게 가슴 아픈 수고를 계속해왔던 걸까. 민호는 태민의 허릴 끌어안았다. 얇은 허리가 한 품에 안겨왔다.


“미안해, 태민아.”

그동안 숨겨온 진실들, 그리고 심술궂게 표현한 모든 마음들.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 정말 미안해. 민호는 속 안에서 한 없이 중얼거리던 사과를 내뱉었다. 그 날부터 항상 마음에 되 내이고 새기고 중얼거리던 미안하다는 말을. 태민은 대답 없이 민호의 머리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따뜻한 손의 체온이 민호에게 전해졌다.

‘괜찮아.’

말을 하지 않아도 들리고

‘이젠’

마음 깊숙이 전해진다.


민호는 머리위에 올려 진 태민의 손을 잡아, 끌어 내렸다.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고개를 온전히 돌려 태민을 바라보던 민호가 잡았던 손을 푸르고 천천히 태민의 목에 손을 감았다. 태민의 검은 눈동자가 민호의 머리카락에 닿았다가, 이마에 닿았다가, 코 끝에 닿았다가, 입술에 닿는다. 오롯이 별빛에만 의존한 어두운 병실에서, 작은 숨소리만으로 가득찬 이 작은 공간에서. 단 둘 뿐이라는 그 두근거리는 사실을 마음에 품은채로. 태민은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태민의 감긴 눈꺼풀을 확인한 민호가 천천히 다가가 작고 붉은 태민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개었다. 따뜻한 숨이, 입술이, 닿았다.

길게 뻗은 태민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 한 순간이라서? 아니면, 아니면…….


“이태민.”

떨어진 입술 사이로 민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고 낮은 목소리. 언제나 그리움에 젖어 저도 모르게 귓가를 맴돌았던 그 목소리. 태민은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 위로 밝은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대답해.”
“응‥.”

천천히 눈꺼풀을 끌어올린 태민이 작게 대답하며 민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 위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근거린다. 엄청 크게.”

두근거림이 닿아서 부끄러울 만큼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너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우리의 것인지.







민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했다. 여전히 왼쪽 팔엔 커다란 깁스를 한 채였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보통사람보다도 더 건강해보였다. 민호가 퇴원하던 날에도 태민은 병원을 찾았다. 하얗던 병원 복을 벗어던지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민호의 모습에 태민은 또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이상하게, 민호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뒤로는 모든 것이 처음인 냥 낯설었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을 더욱더 숨기기 어려웠다.

민호의 짐 몇 개를 나눠들고 태민은 약간 뒤로 물러나 트렁크에 짐을 싣는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아이는, 매 번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봤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항상. 애석하게도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 번쯤은 돌아보겠지. 그런 기약 없는 중얼거림을 계속해왔는지도….


불쑥 돌아선 민호가 태민의 손에 들린 자신의 짐을 뺏어 들곤,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트렁크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한쪽팔로 용을 쓰려니 영 서투른지 들고 있던 종이가방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호가 줍기 전에 얼른 다가가 가방을 들어 올린 태민이 종이가방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종이를 꺼내 들었다. 빳빳한 사진. 지난여름 민호와 갔던 바닷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직접 인화를 해 민호에게 나눠줬던 기억이 난 태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녀. 태민이 사진을 본 것을 발견한 민호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얼핏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귀가 보였다.

“웃긴다 너.”
“뭐가. 흠, 빨리 넣어. 출발해야 돼.”

여전히 돌아선 채로 빠르게 대답한 민호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여전히 얼굴가득 웃음을 거두지 않은 태민이 그런 민호의 모습을 보며 더 크게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귀여워. 민호가 알면 펄쩍 뛸 생각을 하면서.


태민이 뒷자석에 오르자 그제야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출발했다. 민호의 부모님은 회사사정으로 민호의 퇴원을 함께하지 못 했다. 태민이 애써 발걸음을 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민호는 혼자도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태민을 막을 순 없었다. 미련하게 굴지 좀 마! 하며,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유난이냐고 태민은 얼굴을 굳혔다. 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 솔직히 말해 조금 섭섭했다.

조금 흔들리는 택시 뒷자석에서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던 태민이 민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트 위에 올려놓은 태민의 손 위로 민호의 커다란 손바닥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민호를 바라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 웃는 기색의 눈이 태민과 마주했다. 따뜻하다. 커다란 손바닥 안은. 태민도 짐짓 놀란 기색을 감추고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따뜻하다. 그냥 그런 느낌만 가지고. 차창 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세상은 아직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꼭 봄이 온 것처럼 마냥 따뜻하기만 하다.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한 품 가득 짐을 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며칠 입원해있지도 않았다면서 쓸 데 없이 물건만 많다고 태민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짐의 대부분이 만화책이었다. 태민은 상자를 가득채운 만화책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집에 가면 밥 해줘. 배고파.”
“아주 대놓고 시켜먹는다?”
“나 한 손 밖에 없잖아. 내가 해 그럼?”
“누가 안 한데?”

때마침 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땡- 하고 울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태민은 뒤도 안돌아보고 쌩하니 걸음을 옮겼다.



민호가 어질러진 짐을 정리하는 동안 태민은 손을 걷어붙이고 주방에 섰다. 뭘 해주면 좋을까 싶어 냉장고를 뒤지다가 결국 선택한 메뉴는 김치볶음밥이었다. 혼자 자취를 하던 것도 아니고, 매번 엄마가 차려주는 밥만 먹을 줄 아는 스무 살짜리 남자애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김치를 꺼내 잘게 썰고 혹시나 심심할까봐 스팸도 썰어 넣었다. 뭐 이렇게 대충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후라이팬에 밥이랑 재료를 몽땅 쏟아 넣어 볶으니 어느새 제법 김치볶음밥의 구색을 갖추었다. 음식냄새를 맡고 어느새 주방으로 온 민호가 태민의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뭔지 뻔히 보이면서도 괜히,

“뭐야”

하고 물으면서. 태민은 맛을 보기 위해 제 입으로 가져가던 수저를 등 뒤의 민호에게 건넸다. 오물거리며 한참을 씹던 민호가 뜻 모를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맛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뭐, 나쁘진 않네.”

어깨를 으쓱거리며, 민호는 숟가락에 남아있던 밥알을 몽땅 입으로 털어 넣었다.


“가서 숟가락이랑 놔.”

가스 불을 끈 태민이 돌아서 민호의 어깨를 밀었다. 제 숟가락은 입에 문 채로 수저 저분을 챙겨 군소리 없이 식탁으로 간다. 그런 민호를 말없이 보던 태민이 조금 묵직한 후라이팬을 들어올렸다.

“받침대, 받침대 있어?”

후라이팬이 꽤나 무거운지 식탁으로 들고 오던 태민이 다급하게 받침대를 찾았다. 얼른, 얼른! 재촉하는 목소리에 민호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른 식탁 가운데에 받침대를 올려놓은 민호는 여전히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 민호의 태도에 지긋이 미간을 찌푸린 태민이 매서운 투로 민호를 쏘아붙였다.

“왜 웃어?”
“귀여워.”
“뭐어?”
“귀엽다고. 하하-”

귀엽다니, 그런 말을 그렇게 솔직하게. 태민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몰래 속으로만 했는데, 너는 왜 대놓고야. 별것도 아닌 것이 분명한대도 태민은 그게 마음에 들질 않았다.







새해가 밝은지도 한  달이 훌쩍 넘어 어느새 2월 하고도 두 자리 수가 되었다. 그간의 두 사람은 평온했다. 마음을 확인한 뒤론, 여느 시작하는 연인들과 다름없는 풋풋함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말 한 뒤로 친구일 때와 달라진 게 뭐지 싶을 정도로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 혼란스러울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태민은 거울속의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했다. 졸업식 날이다. 수능 날처럼, 생각보다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래도 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은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제 이름이 촌스럽게 새겨진 누구도 아닌 이태민을 위한 이 옷을 말이다.

화장실에서 나온 태민을 반긴 것은 잘 차려진 식탁과 예상처럼 씁쓸한 얼굴을 하고 의자에 앉아있는 엄마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태민의 표정과는 달리 태민의 엄만 무엇이 그렇게 아쉽고 섭섭한지 축 처진 눈 꼬리가 가실 줄을 몰랐다.

“엄마가 졸업하는 것도 아니면서.”
“너는 아쉽지도 않어?”
“뭘.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다 지나왔는데.”
“그래도 고등학교는 조금 다르지‥.”

글쎄…….

태민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부모님은 11시까지 오면 된 데.”

밥을 한 술 뜬 태민이 맞은편에 앉은 엄마에게 말했다. 멍하니 딴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고 있던 엄마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온데?”
“너희 아빤 회사 때문에 안 된다더라. 오늘도 새벽같이 나갔어.”
“응.”

그것조차도 별로 아쉽지가 않다는 듯 태민은 또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치를 끝으로 모든 준비를 끝낸 태민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쯤 나가면 되겠지. 날씨가 덜 풀려 아직 추웠지만 교복 마이 위에 뭘 걸치진 않았다. 손에 휴대폰만 덜렁 들고 집을 나선 태민은 순식간에 얼굴을 덥는 차가운 공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 추워- 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입김이 가득 피어올랐다. 아파트 정문이 가까워지자 정문 앞에 기대어 선 인영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였다.

“최민호!”

태민의 부름에 민호의 고개가 빠르게 태민을 향했다. 민호가 가까워지자 천천히 옮기던 걸음을 바삐한 태민이 금세 민호의 앞에 다다랐다.

“뭐야 너.”
“응?”
“왜 이렇게 입고나왔어. 안 춥냐?”
“춥지.”
“아, 진짜.”

겨우 마이 하나 덜렁 걸친 태민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짜증섞인 탄생을 내뱉으며 미간을 좁힌 민호가 제 목에 두르고 있던 검은 목도리를 풀러 태민의 목에 칭칭 둘러맸다. 코끝까지 감싼 목도리가 답답한지 태민이 목도리를 조금 끌어내렸다.

“자꾸 이러고 다녀라 너.”
“아 알았어.”

민호의 잔소리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태민이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태민을 바라보던 민호가 패딩 주머니에 손을 꼽으며 저도 따라 발걸음을 떼었다.

어느새 나란해진 걸음에 민호는 태민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이제는 이런 것이 조금 익숙하다는 듯 태민도 별말 없이 민호를 한 번 힐끔거리곤 말았다. 날씨가 풀리질 않아 일전에 내린 눈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검은 듯 하얀 풍경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지만 태민은 이제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치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풍경이 이래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날이 추워도 따뜻한 것은 따뜻하다.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어‥”

쉼 없이 걷던 태민의 걸음이 멈춘 것은 버스정류장에 다다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버스정류장은 아직도 저만치에 있었고, 민호의 팔은 여전히 태민의 어깨 위에 올려 져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앞에는

“지혜‥.”
“어, 태민아.”

지혜가 서있었다. 사복차림에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조금 졸린 기운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우리 동네엔 웬일인가 싶어 태민은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로 지혜를 바라보았다.

“아, 나 여기 친구네서 자고 집에 가는 길이야.”
“아‥.”
“너네 오늘 졸업 하나봐?”
“응? 아, 어.”
“졸업 축하해.”
“어. 너도.”

짧은 대화였지만 이전만큼의 어색함은 없었다. 지혜의 시선이 태민의 어깨를 감싼 민호의 손에 닿았다 이내 다시 태민의 얼굴로 향했다. 그래, 분명 마주친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 분명 일전에 태민과 함께 마주친 적이 있다. 아는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다 그냥 지나쳐버렸던가. 지혜는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아는 사이였구나.

작게 손을 흔들며 지혜는 두사람을 지나쳐갔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다. 보기 좋네, 두 사람.


“누구?”

지혜가 가자마자 민호가 태민의 귓가에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친구.”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좋은 친구. 태민은 씨익 입 꼬리를 올렸다.




나란히 교실로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에 반 아이들은 난리라도 난 듯 큰 소리로 두 사람을 반겼다. 제일 먼저 달려온 경수가 뭐가 그리도 반가운지 잔뜩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뭐냐, 둘이 화해했어?!”
“무슨. 싸우기라도 했냐 우리가?”
“아니 그럼 그건 뭔데. 권태기였어?”

장난스럽게 물으면서도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이 꽤나 반가운 눈치였다. 두 사람도 아이들의 그런 반응이 싫지만은 않은지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었다. 쉬는 동안 다들 성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안간힘을 쓴 모양인지, 살이 제법 빠진 아이도 있었고, 머리를 염색한 애들도 여럿 보였다. 경수는 엄마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뚫었다는 피어싱을 자랑하듯 보여줬다.


스피커를 통해 졸업생들은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태민을 붙잡아 앉힌 민호가 기다리라는 듯 눈짓을 했다.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아이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교실이 비워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드디어 교실이 텅 비자, 그제서야 민호는 잡고 있던 태민의 손목을 놓았다.

“왜”
“마지막이잖아.”

민호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앉아있던 태민의 앞에 섰다. 텅 빈 교실에 가득한 적막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맞은편에 선 민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태민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우리 자주, 이런 식으로 마주했던 적이 있지. 정말 질긴 인연이라고 몇 번 생각했던 것도 같다.

태민의 앞에 가까이 다가선 민호가 갈색 빛이 도는 태민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목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내려가던 고개가 옆으로 틀어지며 짧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마주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 태민은 절로 얼굴을 붉혔다. 뭐야 갑자기. 불쾌하다는 듯 한 목소릴 하면서도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졸업 축하해 이태민.”

붉어진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했다.



너도 졸업 축하해, 최민호.







처음 만났던 날 보다, 너와 내 키가 자란 것처럼. 우린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그것이 키가 되었건, 마음이 되었건, 생각이 되었건 말이다. 나는 언제나 너의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나는 누군가가 말하는 좋은 친구의 조건에 조금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 생각은 맞았다. 나는 더 이상 너의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없다. 하지만,

너보다 조금 앞설 땐 너를 이끌고, 너보다 뒤쳐질 땐 망설임 없이 너에게 손을 뻗는다. 그런 사이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 둘’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말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누군가를 상처주고. 죽을 만큼 아팠다가, 또 죽을 만큼 두근거렸다가. 나는 오로지 너로 인해 많다면 많을 그 복잡한 감정과 상황을 직면했었다. 마냥 피하고만 싶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와 돌이켜 떠올리면 나를 이끌어준 원동력이었고, 나를 성숙하게 한 요소였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나를 이만큼이나 성장시켰다. 눈물이 날 만큼 아찔하다. 너로 인해 흔들렸던 내 열아홉이. 이제는 떠올리면 웃으며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나는 또, 너로 가득한 스물을 채워갈 것이다. 너를 더욱더 좋아하게 될지도, 혹은 더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또 다른 일 년을 너로 채운다는 그 사실에 나는 또 마냥 행복해지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너와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왜 가끔, 무언 갈 시작할 때 괜히 귓가에 음악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시작하는 추억의 입구에 선 나는 자꾸 경쾌한 음악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그냥 네 손을 잡고 걸으면 된다고. 발걸음이 가는 데로 걸으면 그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주문 같다. 너와 함께하라는, 마법의 주문. 그래서 또 마냥 그렇게만 하면 될 것 같다. 그게 정답인 것만 같다.


함께해주어 고마워.
내 아픔을, 사랑을, 추억을.
모든 것을. 이태민이라는 이름 옆에 최민호 세 글자를 적을 수 있게 해줘서.
앞으로도 함께 해줄 네가 있어서.


고마워.
그리고….







안녕.
안녕히.







개새끼
Fin.






[투민] 개새끼 08 3_ 개새끼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자 주위에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더 이상 못 뛸 것 같은 느낌인데도 걸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냥 무작정 앞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달렸다. 뒤에 누가 서있고, 지금 누구 때문에 달리고 있는지 그런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아니다,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 번 거친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숨이 목까지 차올라 힘이 들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런 걸 좋아한다고, 그런 감정을, 그런 느낌을. 좋아한다고 말 할 리 없어.

자꾸 생각나고, 내 마음을 어찌 할 수 없는 걸, 그런 걸…….



태민은 서툰 손길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지혜, 지혜, 지혜. 그녀의 이름을 뒤지고 또 뒤지며. 겨우 찾아내 곧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발은 바삐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잔잔한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임과, 설렘이 뒤 섞인 목소리가.

“여보세요‥”

춥다, 아주 추운 겨울이다.

한 번도 이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어 태민은 머리가 복잡했다. 좋아한다느니 뭐 그런 간지러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그런 것 따위는. 그래서 두려웠다. 그게 정말이라면. 자신이 품은 감정이. 매일 자신의 머릿속을 뒤덮고 넘쳐흘러 감당할 수도 없게 만들었던 최민호에 대한 기억과 상념들이 자꾸만 가슴 한구석을 자극해 빌어먹을 애틋함 같은 걸 만들어내었던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인정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아니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여보세요..?]
“지혜야”
[어?]


“사귀자.”

계속해서 달렸다. 어느새 학교를 벗어나 버스정류장도 한참을 지났다. 집으로 가는 길도 아니다. 분명 엉뚱한 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로 날아드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도망친다. 도망치는 거다. 우리 사이에서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분명 내가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태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 미안해 지혜야.
널 이용해서.

그래도 나는 무서워서, 최민호에 대한 내 감정. 정말로 무서워서 감당할 수 없으니까.




개새끼 08




“수시 쓰는 애들 희망대학 종이 뽑아온 거 가지고 석식 먹고 번호대로 교무실로 와라.”

말을 끝으로 담임이 반을 나서자 반은 도로 소란스러워졌다. 또 지겨운 하루의 시작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만원 버스를 타고 학교로 등교하고, 졸음을 쫓아가며 꾸역꾸역 아침자습을 하고 나면 끝이 보이지 않는 수업이 시작된다. 칠판 위의 디데이 숫자는 하나씩 줄어가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떠들고는 있지만 아이들의 긴장감은 한층 더해만 간다. 수시 시즌이 시작됐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수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태민은 지원 대학을 물색하느라 며칠 전부터 머리가 깨질 듯 했다. 민호와의 일이 있고 난 후 가끔씩 공상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고, 그럴 때면 정작 수시라던가 하는 중요한 일에 제대로 주위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태민의 반 담임은 웬만해선 수시를 잘 안 써주기로 유명했다. 작년에도 반에서 다섯 명 정도만 수시를 썼다고 했다. 소문 탓인지 선뜻 수시를 쓰겠다고 나서는 아이들이 그리 많진 않았다.

태민은 고민의 흔적으로 어느새 꾸깃해진 종이를 꺼내들었다. 몇 개의 학교가 써졌다 지워지길 반복했다. 전부터 생각해놓은 과가 있긴 했지만 이전까진 확실히 대학을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요 근래 태민은 절실히 실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만치 않은 부담감이 불쑥 앞길을 막는 것 같았다.

“넌 수시 쓰지?”

준우가 무신경하게 툭 태민의 옆구리를 쳤다. 그럴 참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제법 부럽다는 시선으로 태민을 바라본다.


“넌, 안 써?”
“내 주제에 무슨. 내 내신으론 아무데도 못 가.”

태민은 말없이 종이를 고이접어 다시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수시 붙으면 진짜 좋겠다. 마음도 편하고.”

준우는 자기일이라도 되는 냥 눈을 반짝였다. 최저 걸리면 그렇지도 않지 뭐. 태민은 무심한 듯 웃어보였지만 저도 모르게 간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러 뭐로 더 이상 수능공부에 매진할 기운이 없었다. 펜을 잡아도 그날의 일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잔잔한 호수 위로 누군가 멋대로 손을 담근 것처럼, 어지럽게 퍼지는 파장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석식을 먹는데 영 소화가 안 돼 몇 숟갈 떠먹다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디 아프냐며 걱정스러운 눈치로 물어오는 유호에게 괜찮다고 대답하곤 먼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 천천히 먹고 와. 애들이 부러 걱정하지 않도록 애써 웃으며 급식실을 빠져나왔다. 태민의 학교는 급식실이 따로 떨어져 있어 교실로 돌아가려면 운동장을 지나야 했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에 하복 밖으로 나온 팔뚝에서 소름이 돋았다.


반으로 들어서자 텅 빈 교실이 태민을 반겼다. 아니, 딱 한 자리. 비워지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복도 창가 쪽 뒤에서 두 번째. 최민호의 자리. 저녁을 먹지 않았는지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꿈을 꿀까. 최민호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답답하다. 좀 전 까진 속이 더부룩하기만 했는데, 이젠 목 끝까지 뭐가 차올라 답답하기까지 하다. 가방에서 아까 넣어놓았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수시 상담을 받는 애들 중에 자신이 몇 번째 쯤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 맨 앞은 아닐 테지만 그냥 교실을 나섰다. 민호와 단 둘이 교실에 있는 건 곧 죽어도 못 할 짓이었으니까.


교무실로가자 담임과 다른 아이가 상담을 하고 있었다. 담임에게 고개만 꾸벅 숙이고 옆에 빈 의자에 앉았다. 애매한 거리라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길 나누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쟨 나보다 공부 잘하니까, 그래도 나보단 높은 데 쓰겠지. 깨끗한 바닥 위를 슬리퍼 신은 발로 살살 긁었다. 손때 탄 종이를 펴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여기, 정말 갈 수 있을까. 조금 높여 써오긴 했지만 뭐라 한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 상담이 끝났는지 먼저 와 있던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를 들고 담임에게 다가가자 담임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구겨진 종이를 내밀고 의자에 엉덩일 붙이고 앉았다. 검열을 받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상향해서 몇 개 더 쓰지 그래?”

담임은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아, 그래도 되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태민에게 웃으며 그건 네 자유지. 태민의 이름이 적힌 학생부를 클릭한다.

“작년에 네 성적쯤 되는 선배가 한 명 있었는데 지금 네가 쓴 것보다 조금 높은 데 수시로 들어갔거든.”
“일반전형으로요?”
“아마 그랬을 걸?”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임을 따라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름에 냈던 여권사진이 학생부에 떡하니 달려있는 걸 보자 태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저거. 머리를 야무지게 귀 뒤로 넘기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저걸로 대학 원서를 써야 해? 태민은 질겁을 하 듯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날, 지혜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지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자는 전화. 목소리는 전 보다 몇 배는 더 망설임으로 가득했다. 늘 만나던 카페로 장소를 잡고, 태민은 부러 몇 분 일찍 나가 앉아 있었다. 아직도 이건 절대 잘하는 짓이 아니라는 죄책감 비슷한 것이 마음을 짓 눌러 견딜 수가 없었다. 풍경이 어지러운 숲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손에 쥔 나침반은 고장이 나 자꾸 이상한 방향을 가리킨다. 아니, 고장이 난 건지 그게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이젠. 가라고 하는 저 길이 맞는 건지. 그렇다고 무작정 외면해버리는 게 맞다고 할 수 있는 지.

시켜놓고 한 입도 먹지 않은 음료수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카페 문이 열리며 지혜가 들어왔다. 동그란 눈이 잠시 헤메다 태민을 발견하곤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안녕”
“어, 안녕.”

지혜는 태민의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지금 이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태민으로선 잘 짐작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위를 맴도는 이 공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있지‥ 네 전화 받고서.”
“응.”
“계속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태민은 갑자기 목이 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진심이 아니라는 거, 알겠더라.”

달칵. 하고 얼음이 우는 소릴 냈다. 아, 추워죽겠는데 나는 왜 이런 음료수를 시킨 거야. 늦은 후회를 하며 태민은 쥐고 있던 음료수 잔에서 손을 뗐다. 지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갈색으로 염색을 했는지 조금 연해진 단발머리를 하고. 아, 그런 거 다 알 수 있구나. 태민은 진실을 말하는 지혜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진심이 아니잖아’하고 말하는 지혜의 말이 문득 실감이 나서 또다시 태민은 어딘가에 발목이 묶여버린 것 같았다.


“미안.”
“아니야, 내가 미안.”

카페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엔 정적만 흐르는 것 같았다. 무언가 빠진 것처럼, 분명 그랬다.


“어제 전화할 때, 너 되게 불안해 보였어.”
“어?”
“처음엔 막 달리면서 전활 걸어서 그런 가 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말이야.”
“…….”
“아주 많이 불안한 것 같았어.”


뭘 몰라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알지 말아야할 걸 알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혜는 다 아는 사람 같았다. 어지러운 태민의 마음도, 알다가도 모를 이 복잡한 상황들도 모두. 따뜻한 눈이 다 알고 있으니 숨기지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태민은 또 덜컥 겁이 났다. 들추고 싶지 않다. 민호가 말했던 그 감정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가리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알다가 그냥 묻어버렸으면 싶다. 아니 알아도 모른 척 해줬으면. 그랬으면 싶다.


나, 최민호를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나 정말로 너 진심으로 좋아했어.”
“…….”
“아주 많이. 알지?”
“..응.”

지혜는 언제나 솔직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래서 태민에게도 꼭 솔직해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말이야 듣는 사람 맘이라지만, 지금은 마냥 그렇게 들렸다.


“데려다 줘. 버스정류장까지.”
“응.”
“마지막이니까.”

이제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만날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언젠가 ‘친구’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태민은 지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하얗게. 찬바람이 얼굴을 훑어 두 사람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태민은 코끝까지 목도리를 끌어올렸다. 그래도 춥다. 추운 건 어쩔 수 없다.


이 목도리, 최민호랑 같이 산 건데.

그래도 생각난다.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애, 다시 이 목도리 두르고 있었지‥.

..좋아한다.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교실로 들어서자 무슨 일인지 애들이 떠들썩했다. 늘 상 시끄럽긴 했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한 주제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으며 짝인 준우에게 물으니 자리를 바꾼단다.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뭣 하러 싶지만 이미 정해진 일인지 반장이 제비뽑기 할 종이를 심혈을 기울여 섞고 있었다. 조회시간 직전이 되자 밖에 있던 아이들도 다 들어와 자리고 찼고, 교탁에 선 반장이 순서대로 번호표를 뽑게 했다. 누구랑 앉던 어차피 사내놈들만 득실거리는 교실이니 애들도 그닥 흥미로워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먼저 일어선 준우의 뒤를 따라 번호표를 뽑으니 ‘7번’ 혹시 앞자리일까 싶어 먼저 인상부터 찌푸렸지만 랜덤이라 다행히 뒷자리였다.


“야, 너 몇 번이야?”
“나 7번. 넌?”
“나 24! 어, 아- 우리 완전 떨어졌네.”

준우의 자리는 태민의 새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몇 칸은 가야하는 먼 곳이었다. 작별인사라도 하듯 준우의 등을 툭 치고 책걸상을 옮겼다. 수십 개의 책상 끄는 소리로 반 안이 가득 찼다. 전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아 무리 없이 책상을 끌고 올 수 있었다. 짝은 누굴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근처에서 책상을 끌고 오는 민호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민호는 아직 태민을 발견하지 못한 건지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뭐 이런 같지도 않은 우연이 다 있단 말인가.

태민이 급하게 자리라도 바꾸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때서야 태민을 발견한 민호가 소리 없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내가 뭘 잘못해서 피해. 태민은 갑자기 못된 고집이 피어올랐다. 그대로 무작정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이대로 최민호와 짝이 되어도 좋다, 이런 게 아니었다. 잘못한 쪽에서 먼저 피해줬으면 싶었던 거다. 그런 태민의 생각을 읽었는지 민호는 금세 다른 아이와 번호를 바꿨다.


“야. 너네 싸웠어?”

새로운 짝이 된 경수가 태민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싸운 건가. 이걸 싸웠다고 할 수 있는 건가. 태민은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니까, 잘 모르겠다. 지금 최민호와 이태민 사이에 일어난 이 균열이 고작 티격 대는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몰라.”
“계집애들도 아니고. 야 그냥 한 대씩 때리고 화해 해.”

화해 할 것도 없다.


“그런 거 아니야.”

태민은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말로 이 상황을 그렇게 단순히 정의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한 대씩 때려버리고 모두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매일 밤 악몽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서로 불편하게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아.


“맞다 너 수시 쓴다며?”

태민이 불편해하는 걸 느꼈는지 경수는 화제를 돌리려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 하고 대답하는 태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등교를 했다. 방학식에는 반드시 참석을 해야 한다며 학교에서 전체문자를 돌렸다. 평소처럼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난 것 때문인지 태민은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다. 운 좋게 버스에서 빈 의자에 앉아 가긴 했지만 어깨 위로 내려앉은 피곤함은 가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에 가면, 최민호 다시 보겠지.

다시 민호의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요즘은 어쩔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안 된다고 해도 안 될 수 없고, 싫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한 길에서 비롯된 것들에 의해서.


천천히 눈 덮인 운동장을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학교를 안 나온 지 그리 오래 된 건 아니지만 이 냄새가 조금 그리웠던 것도 같다. 끝도 없는 것 같았던 이 계단들도. 이제는 조금씩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실감이 난다. 조금 있으면 이 학교와도 영원히 안녕이다. 교복과 함께 누볐던 학창시절이 모두 말이다.

반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민호의 자리로 시선이 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민호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태민은 얼른 제 친구들이 모여 있는 무리로 걸어갔다. 민호의 생각을 했던 걸, 방금까지도 최민호 이름 세 글자만 중얼거렸던 걸 자신도 아무도 모르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별로 흥미가 가지 않는 대화에 무작정 끼어들었다.


“아, 수능 끝나니까 진짜 할 거 없지 않냐?”
“진짜. 나는 수능 끝나면 내가 존나 이것저것 하느라 바쁠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지?”
“어. 집에서 존나 식충이 취급당하는 거 아냐?”

애들의 대화내용은 대체로 이랬다. 수능이 끝나고 무의미하게 허비한 시간들이라던가, 정시원서를 접수한 대학이라던가. 이미 오래전 수험생의 자리에서 내려온 태민은 대체로 공감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냥 웃으며 들었다. 그러면서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혹시나 민호일까 싶어 자꾸만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시간이 흐르고,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자리를 채울 때 까지 민호의 자리는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평소 지각을 하는 애가 아님을 알기에 태민은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방학식인거 얘기 못 들었나.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아무도 비어있는 민호의 자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태민만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거둘 줄 몰랐다.


담임이 들어섰지만 민호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반에 들어온 담임은 반을 한 번 둘러보다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최민호요.”
“아-”

담임은 이유를 알고 있는지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태민은 당장이라도 담임에게 가 물어보고 싶었다. 최민호가 오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그러지 않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담임은 간단한 당부만 말하고 대청소를 시켰다. 담임에게 말을 걸 기회만 기다리던 태민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반을 빠져나가는 담임의 뒤를 쫓았다.

“선생님!”

복도를 가로지르는 태민의 목소리에 담임이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담임의 뒤로 바짝 다가와 선 태민이 거친 숨을 골라 쉬었다.


“하아. 최민호, 걔 오늘 왜 안 왔어요?”

걱정하는 얼굴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굳어버린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아 민호? 민호 그저껜가 교통사고가 났대.”
“교통사고요?!”

담임의 말에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무슨 교통사고를, 아니 어쩌다가, 많이 다친 건가. 걱정이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글쎄 본인이 직접 전활 한 걸 보면 그렇게 많이 다친 것 같진 않은데, 입원했다고 하더라.”
“거기가 어딘데요?”
“도립병원이라던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멍해진 기분이었다. 가슴이고 머리고, 이성이고 감정이고 최민호에 대한 걱정으로 꽉 들어찼다. 입가엔 그 이름만 맴돌고, 머리엔 그 얼굴만 떠오르고, 귓가엔 그 목소리만 울린다. 토할 것 같다. 토기가 올라와 목 끝이 씁쓸했다. 반으로 돌아가 다시 빗자루를 들고 섰는데도 영 청소를 할 정신이 나질 않았다. 물끄러미 민호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더 텅 비어 보인다.

가고 싶다. 최민호 한테.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뭐해’하는 유호의 물음에도 대답 없이 무작정 자리로 가 벗어 놓았던 패딩에 팔을 끼워 넣었다.


“야, 너 어디 가?”

붙잡는 유호의 팔을 억지로 뿌리치고 태민은 빠른 걸음으로 반을 빠져나와 복도를 달렸다. 며칠 전 이 복도에서 민호를 마주친 날에도, 민호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들었던 바로 그 날에도 이렇게 복도를 달렸었다. 그때는 도망치는 거였는데, 지금은. 지금은‥

가고 있다. 최민호에게.
더 가까이, 가까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택시를 잡아탔다. 늦을 것은 하나도 없는데 괜히 불안해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호가 걸리기라도 하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 이토록 태민을 간절하게 만든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돈을 내고 택시에서 튕기듯 빠져 나와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안내데스크로 가 섰는데, 뒤에서 누군가 태민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어머, 태민이 맞구나? 우리 민호 보러왔니?”

민호의 엄마였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번도 민호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으니 이렇게 만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태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민호의 엄마가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아 왔다. 요새 왜 통 오질 않았어? 아줌만 태민이 보고 싶었는데. 살가운 목소리에 태민도 조금 웃어보였다. 그녀는 태민을 참 좋아했다. 처음이라고 했다. 민호가 집까지 데려온 친구는.


“민호 병실 702호야. 민호 태민이 왔다고 좋아하겠네? 마침 아줌마 집에 가는 길이거든. 태민이가 민호 좀 놀아줘. 그 녀석 혼자 병실에 있느라 아주 심심해 죽으려고 해.”
“네‥”

웃으며 손을 흔든 민호의 엄마는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갔다. ‘702호’ 민호의 병실 호수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 맴돌았다. 엘리베이터에 타 7층 버튼을 누르고 부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 대단한 걸 하러 가는 것처럼 떨리는 가슴이 가라앉질 않는다. ‘7층입니다.’ 하는 기계음에 이젠 심장이 피부를 뚫고 밖으로 나올 듯 했다.

702호는 복도 끝에 있었다. 길고 긴 복도를 걸으면서 태민은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다. 코끝을 찌르는 병원냄새도 맡고 싶지 않았고, 민호를 마주할 용기도 나지 않았으니까. 702라는 숫자가 적힌 문 앞에 서 문고리를 잡은 채로 숨을 골랐다. 이 문을 열면 민호가 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민호를 만난다. 민호를 마주한다. 떨림을‥ 볼 수 있다. 힘을 줘 문고리를 돌렸다. 조금씩 문이 열리고, 온통 하얗기만 한 병실에서 등을 기대고 앉은 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민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인실이었지만 다른 침대는 비어있었다. 아직 민호는 태민이 온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때 끼익- 하고 문 뒤에 서있던 과일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고, 자연스럽게 민호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태민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뛴다.
아주 많이.
아주 빨리.

심장이 뛴다.

마치 처음처럼.

아주이상한 설렘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이태민‥”

최민호가 이태민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게 맞다면. 싫어도 좋을 수밖에 없다. 숨겨도 좋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 바보같이.








heartwomin 1st Fanbook _ heart to heart 쑥떡





혹시나 제 이글루스를 찾아오실 분들을 위해..
제가 참여하는 투민북이 나옵니다. 관심 부탁드려요~!








[투민] 개새끼 07 3_ 개새끼





“왜 그래 최민호”

여전히 떨리고 있는 두 눈의 민호가 태민을 본다. 그 시선에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쾅쾅 두들기고 싶을 만큼.

“하아-”

긴 한숨 끝에 민호는 태민의 팔목을 그러쥐었다. 그런 적이 처음이 아닌데, 민호가 태민의 팔목을 손에 쥔 적이 처음이 아닌데도 다른 날과 다르게 묘하게 힘이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왜’라고 묻고 싶어진다. 태민이 억지로 힘을 주어 빼내려고 하자 민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눈을 마주하는데도 마주하는 것 같지 않다. 서로를 마주보고 있지만 오롯한 시선은 분명 어딘가 어긋나있었다. 그것이 불안할 정도로 실감이 나서 태민의 눈도 덩달아 떨려왔다. 민호처럼.

찰나의 순간 태민은 민호의 눈에서 불안함을 읽었다. 그것도 잠시 태민을 끌어당기는 민호의 손에 이끌려 소각장 옆의 낡은 창고로 끌려왔다. 태민이 입을 열 새도 없이 민호는 힘을 줘 태민을 벽으로 밀쳤다. 딱딱한 벽이 등에 닿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 미쳤어?!”

태민은 순간 불안해졌다. 창고에 들어오기 직전 민호의 눈에서 읽었던 불안감이 자신에게로 온 것만 같았다. 애써 떨림을 감추려는 민호를 향해 손을 뻗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조금씩, 조금씩 떨림이 사그라지는 민호의 눈을 태민은 여전히 불안감으로 가득한 두 눈으로 마주했다.

‘왜 이러는 거야. 멈 춰.’

네가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둬.

태민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가까이 마주하고 있지만‥ 태민의 목소리는 닿을 수가 없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태민.”
“..어?”

잔뜩 물기어린 민호의 부름이 들려왔다. 태민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태민‥”
“…….”
“씨발….”

울고 있지 않은데도, 민호의 목소리는 눈물자국으로 가득했다. 듣는 사람마저 가슴이 시큰할 정도로‥


순간 태민의 어깨를 붙잡은 민호의 손에 힘이 실리며 태민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방금 부딪혔던 벽보다도 훨씬 딱딱하고 차가운, 그래서 마냥 피하고만 싶은 바닥이 와이셔츠를 뚫고 그대로 피부로 전해졌다. 도망치고 싶다. 이게 뭐건 간에. 벌어진 입에선 더 이상 목소리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겁이 났지만 겁이 난다고도 못할 만큼. 태민의 손에 힘이 빠졌다.

민호의 떨리는 손이 서툴게 태민의 와이셔츠 단추를 끌렀다. 몇 번 헛손질을 하다가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그대로 뜯어버리고야 만다. 하얗고 작은 단추 몇 개가 창고 구석으로 날아갔다.


“하지마아‥!”

온 힘을 쥐어 짜 내뱉은 첫마디. 하지만 민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민호의 차가운 손이 태민의 바지 버클을 붙잡은 순간, 태민은 시야가 검어지는 것처럼. 분명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보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개새끼 07
sambackwon.





기말고사가 끝나고 부터는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늦잠 자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며칠은 새벽같이 눈을 떴지만 요샌 집이 텅 빈 오전시간에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고 일어난다. 10시를 나타내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킨 태민은 다시금 길게 하품을 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지혜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니 오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만. 미안한 마음도 미안한 마음이지만 태민은 그것보다도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다. 요새 들어 자꾸만 머릿속을 점령하는 민호의 생각이었다. 지혜에게 고백을 들은 그날, 영화관에서 일방적이긴 하지만 우연히 마주쳤던 그 순간이 잊혀 지지 않았다. 낯선 여자에게 웃는 민호의 얼굴에 태민은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크게 기지개를 폈다. 뻐근함이 가시듯이 너의 기억들도 모두 가셔버렸으면‥


요새는 통 꿈을 꾸지 않았다.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눈을 뜨면 기억나는 것이라곤 지난밤 잠들기 전 했던 쓸데없는 망상들뿐이었다. 어쩌면 그쪽이 태민에게 더 낳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일을 꿈으로서 곱씹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세수를 하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밥생각은 그닥 없었지만 몸이 안 좋아져 엄마의 잔소리도 덩달아 느는 바람에 태민이 삼시세끼를 모두 챙겨먹는지 감시 받고 있었다. 밥솥은 반드시 세 번 분의 밥이 줄어들어 있어야 했다. 대충 반찬 몇 개만 식탁위에 올리고 꾸역꾸역 밥을 삼키던 태민은 문득 군대에 간 태선이 생각났다. 훈련병의 신분이라 자주 전화는 못 했지만 꼬박꼬박 집으로 전화해 온 가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 추울 때 간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태선은 나름대로 군대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태선은 예전부터 낯선 환경에 곧잘 적응했었다.

편지를 쓸 까.

엄마와 아빠는 가끔씩 편지를 써 훈련소로 보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태민에게도 편지를 쓸 것을 권유했지만 초등학교 때 이후로 누군가에게 편지라는 걸 써본 적이 없는 태민은 번번이 거절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쓸 말이라곤 없으면서도 엄마가 서랍장에 넣어두었던 편지지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겨우 밥그릇을 비운 태민은 대충 뒷정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편지지를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고 펜을 찾는데 이상하게 필통이 보이질 않았다. 몇 개 있지도 않은 펜을 몽땅 필통 속에 넣어 다니던 태민이라 그 필통이 아니면 집에 필기구라고는 없었더랬다. 그걸 어디다 뒀더라, 책상 밑에 구겨 넣은 책가방 속에도 필통은 들어있지 않았다. 기억을 곰곰이 되씹는데 그제야 번뜩 기억이 떠올라 무릎을 딱! 쳤다.


“학교!”


학교 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필통이 그제 서야 떠올랐다. 학교에 나가는 마지막 날 필요한 짐은 모두 챙겨 집에 왔던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필통은 서랍 속에 넣어둔 채로 챙길 생각을 못 했다. 제법 값이 나가는 펜들도 꽤 있었던 터라 귀찮더라도 학교에 다시 가지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귀찮아. 귀찮아 진짜.


멍청한 자신을 탓하며 태민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밖에 춥겠지. 퇴근 때마다 온 몸을 움츠리고 들어오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태민은 잘 입지 않던 검은 다운점퍼를 꺼냈다.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그대로 창고를 빠져 나온 태민은 교실을 향해 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지만 바들바들 떨려오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며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한데도 제대로 정리를 할 생각도 못 했다. 폭풍의 눈이라던가 카오스라던가 뭐 그따위 단어들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태민의 머릿속은 누군가 멋대로 구겨놓고 짓밟고 던져버린 것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교실로 들어서자 다행히 다들 열심히 자습을 하고 있어 애써 돌아서 태민을 바라보는 녀석들은 많지 않았다. 단추가 떨어져 제대로 잠그지 못한 와이셔츠 밑 부분을 손으로 여미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리로 걸어간 태민은 책상위에 펼쳐놓은 문제집을 모두 가방위로 쓸어 담고 의자에 걸쳐놓았던 가디건을 입었다. 가방을 걸치고 그대로 돌아서자 뒤에서 누군가 태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토요일이고 조금 있으면 학교가 끝나니 만약 운 나쁘게 걸리더라도 크게 혼나진 않을 것이다. 어쩜 민호와 마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태민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태민은 끔찍했던 방금 전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시야가 어두워지자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무슨 정신으로 버스정류장까지 와서 집에 가는 버스를 골라 탔는지도 모르겠다. 평지를 달리는 버스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태민만은 심하게 덜컹거렸다. 제대로 앉아있지 못 할 만큼 심하게.


절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럴 수가 없다.
절대로 우리가 했던 모든 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외면하고 무시하고 저만치로 밀쳐내도
모든 것은 현실일 뿐이다.


“다녀왔습니다.”

빈집으로 들어선 태민은 의미 없는 인사를 내뱉었다. 빈집으로 귀가하는 것은 익숙했지만 오늘따라 아무도 없는 집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아니 싫었다. ‘어서와’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저를 반기는 엄마의 얼굴이 그리워졌다. 먼발치의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몸을 웅크려도 좀처럼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 방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려왔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면 입김이라도 나올 듯이 태민은 정체모를 추위에 둘러싸여 갈 곳 잃은 아이처럼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민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처음 마주했던 차가운 겨울의 복도에서, 날씨를 닮은 그 매서운 눈매가. 울고 있는 자신을 감싸주었던 그 따뜻한 얼굴이. 지친 기색 없이 운동장을 누비던 그 장난기 어린 얼굴이. ‘이태민!’하고 부르던 그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모든 것이. 최민호의 모든 것이. 눈물로 시야가 흐려질수록 더욱 뚜렷해져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칠게 눈물을 닦아도, 붉어진 눈은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고 다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흐으….”

울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아서일까. 눈물만큼은 꼭 참아야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모두 놓쳐버렸다. 두 손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 반드시 꼭 부여잡고 있어야지 다짐했던 민호의 옷자락을 허무하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음을 알기에 태민은 허전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손에 쥐어져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꽉 쥐고 있었는지 이제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태민의 걸음이 빨랐다. 공기와 마주 닿은 얼굴이 찢어질듯 아려왔다. 상상도 못할 추위였다.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코며 눈이 붉었다. 두 손은 주머니에 콕 박고 목까지 끌어 잠근 파카에 목을 바짝 웅크린 채 걷고 있었지만 추위는 피할 수 없었다.


“이태민!”

그때 태민을 부르는 누군가의 부름이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준우와 유호가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태민도 얼른 주머니에 있던 손을 꺼내 손을 흔들었다.


“웬 일이야?”
“너넨?”
“정시상담 받으러 왔지. 넌?”
“뭐 가지러.”

아 그래, 아직 정시가 남아있었지. 태민은 금세 붉어진 손을 얼른 주머니 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야 존나 춥지 않냐?”
“그러게. 가라. 아 연락하고!”
“어 너도~”
“잘 가 태민.”

태민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얼른 건물을 향해 뛰었다. 군데군데 눈이 빙판길로 변해있는 곳이 있어 몇 번 휘청 하긴 했지만 다행히 미끄러지진 않았다. 신발 밑창에 붙은 눈을 털어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확실히 한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인기척이라곤 없는 텅 빈 건물이 조금 낯설었다.

4층 복도로 올라오자 넓은 창으로 햇빛이 비췄다. 햇빛은 저렇게 따뜻한데 뭐 이렇게 춥고 난리야. 태민은 창밖으로 눈 덮인 새하얀 운동장을 한 번 힐끔거렸다. 아직 담임이 교실에 있으려나. 태민은 교실 문을 살짝 열어 반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때 문 앞에 서있던 누군가의 옷자락에 이마를 부딪쳤다. 교실에 있어서 그런지 서늘한 기운이라고는 없었다.

“아-”

단추에 맞은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들자 태민을 내려다보는 낯익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아, 씨발.

죽어라고 외면해도 죽어라고 안 잊혀 지던 그 얼굴이다. 답답함에 아픈 줄도 모르고 가슴을 두들기게 만든 그 얼굴.

안 보려고 해도 봐야만 하는 걸까. 참 지독하다. 지독한 인연이다.


“어, 태민이 웬 일이니?”

민호의 등 뒤로 노트북을 챙겨 반을 나가려는 담임의 얼굴이 보였다. 태민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뭐 가지러 왔어요. 하고는 민호를 지나쳐 반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지금 최민호가 날 보고 있을까. 태민은 괜히 등이 따끔거렸다. 그나저나 뭘 가지러 왔더라. 민호를 본 순간 머리가 하얘져 자신이 뭘 가지러 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필통을 보자 그제야 필통을 가지러 왔던 것이 떠올라 얼른 제 책상으로 가 서랍을 뒤적거렸다. 손에 길쭉한 필통이 잡혔다. 얼른 매고 온 가방에 필통을 집어넣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자신의 사물함을 열어젖혔다. 다행히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석에 박힌 체육복이 보였다. 먼지를 털 세도 없이 그것도 얼른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제 됐겠지 싶어 고개를 다시 문으로 돌렸는데 열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있었으면 싶었나. 아니, 최민호가 그 곳에 서있기를 바랐었나.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이태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모르겠다.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다. 자꾸만 떠올라 머리를 잠식하는 민호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주하면 먼저 민호를 쫓는 자신이 시선도. 머물러 주었으면 계속 이렇게 자신을 봐 주었으면 하는. 이 알다가도 모를 심보도. 알 수가 없다. 헷갈린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방을 매고 교실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문 앞에서 태민을 잡아당겼다. 민호였다. 안심이 되듯 빨라졌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다.

“할 말 있어.”

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었다. 저 낮은 목소리가 며칠 전부터 그리웠다. 분명히.


“놔.”

태민은 얼른 손을 뺐다. 호흡이 짧아진다.


“할 말 있다고”
“…….”
“잠깐이면 돼.”
“하지 마.”

할 말 있어도 하지 마.


너랑 있으면 숨을 못 쉬겠어. 머리도 복잡해. 그냥 죽을 것 같으니까, 하지 마.



우리 사이에서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최민호일까, 이태민일까.








주말 내내 잠만 잤다. 수능이 얼마나 남았다고 늑장이냐며 자신을 꾸짖는 형의 목소리도, 그런 형을 말리며 피곤한데 내버려 두라며 자신을 위해주던 엄마의 목소리도 잠결에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잠을 자는 것 외엔 이 두려운 상황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절대로 오지 않았으면 싶었던 월요일이 왔다. 학교에 가야만 한다. 또 다시 최민호의 얼굴을 마주봐야 한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태민은 그 끔찍한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교실 문을 열자 아직 담임이 오지 않아서일까 안은 비슷한 톤의 남자아이들 목소리로 왁자지껄했다. 부러 민호의 자리엔 시선도 돌리지 않고 곧장 자신의 자리로 와 가방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이틀을 내리 잤으면서도 잠이 부족한지 아직 몽롱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그 전부터 민호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어쩌면 토요일의 그 일은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그건, 나일까‥

태민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준우가 안색이 안 좋다며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확실히 잘 잔 사람 치고는 얼굴이 창백하고 볼품없었다. 태민은 퍼석한 얼굴을 맨 손으로 쓸었다. 지난 밤 꿈에 민호가 나왔다. 꿈이었는데도, 태민은 화들짝 놀라 온 몸을 떨었다. 편하고 소중했던 친구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슬펐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고 마구 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베개는 젖어있었다.

다른 곳으로 집중하기 위해 문제집을 꺼내 펼쳤다. 깨알 같은 글자들이 물 위로 퍼지듯 흩어지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자신도 휩쓸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힘이 든다. 숨을 쉬는 것도, 눈을 깜박이는 것도. 민호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무엇이라도 원망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게 민호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무엇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원망하는 것조차 싫었다.



“야 이태민. 이거 최민호좀 가져다줘.”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다른 반 녀석이 태민에게 민호의 체육복 윗도리를 던졌다. 다른 녀석이 입었을 텐데도 옷에서 민호의 냄새가 가득 배어 나왔다.

“네가 가져다 줘.”
“뭐? 아 왜, 너 같은 반이잖아.”
“네가 해. 난 싫으니까.”


태민은 녀석의 품에 민호의 체육복을 안겨주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굳은 표정이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뒤에서 친구녀석이 계속해서 태민의 이름을 불렀지만 무시했다.


태민이 교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까 체육복을 던졌던 녀석이 반에 들어섰다. 문가 근처에 앉은 민호에게 체육복을 건넨 아이가 슬쩍 눈치를 보며 태민에게 다가왔다.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만 부러 모른 척 턱을 괴고 책상 위의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야, 너 최민호랑 싸웠어?”
“…….”
“싸웠냐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왜‥”

태민은 눈을 치켜뜨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민호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문제집을 넘기며 눈치를 주듯 헛기침을 했다. 결국 대답을 듣길 포기한 녀석이 돌아서 반을 빠져나갔다. 민호가 앉은 자리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차라리 싸웠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감정소모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이전에 민호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운 적은 없었다. 둘 다 쉽게 화를 나거나 화를 내는 타입이 아닌 지라 조금 투닥거리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다툼도 없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 백 번 천 번 나았다. 그럼 어떻게 사과를 건넬지나 고민하고 앉았지 지금처럼 현실을 직면하며 머리가 깨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목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부디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조금이라도 이 현실에 무뎌질 수 있도록 시간이 빨리 흘러주었으면. 태민은 무릎 위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돌아서는 태민의 손을 민호가 다시 한 번 낚아채듯 붙잡았다. 손에 가해지는 힘에 태민의 몸이 절로 돌아섰다. 제법 진지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린 민호가 태민을 내려다보고 있다.


“할 거야.”
“…….”
“그러니까 들어.”

최민호는 예전부터 제멋대로였다. 아주 자기 마음대로‥
그런데 아주 제멋대로다. 나도 나를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태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민호와 마주한 뒤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오늘만큼 절실했던 적은 없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적도, 그래서 실제로 귀를 틀어막고 안 듣겠다고 발악을 한 적도 많았지만 오늘만큼 듣기 싫은 적은 없었다. 울 것 같다. 울기라도 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을 만큼. 아니, 울어서라도 이 빌어먹을 이상한 감정을 쫓아버리고 싶다.


“병신새끼.”

태민은 저도 모르게 좋지 않은 말이 나갔다. 잡힌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매섭게 민호를 노려보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난 너 용서도 못하고 이해도 못해! 그러니까 제발‥!”
“…….”

“나 좀 내버려 둬.”

민호는 언제나 태민을 뒤흔든다.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고 해도 반드시 넘어지게 한다. 그런데 요즘엔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자꾸만 태민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수도 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어지를 데로 어지른다. 치울 수도 없게.


태민은 돌아섰다.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민호의 숨소리.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 누구 하나 규칙적인 것이 없었다. 아, 울 것만 같다. 이제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다.




“..좋아해‥!”


눈물이 떨어졌다. 눈가가 화끈거리고 목이 메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힘이 든다.

“좋아해서 그랬어. 네가 좋아서.”
“…….”
“매일 네가 생각나서.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민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있지, 매일 생각나고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으면 그건 좋아하는 거야? 그걸 좋아한다고 그러는 거야?


“호기심도, 장난도, 홧김에 한 것도 아니야.”

태민은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뗐다.


“널‥ 갖고 싶었어.”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태민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달렸다. 심장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어우러졌다. 있지, 정말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해? 정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좋아해.”

갈 곳을 잃은 민호의 손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투민] 개새끼 06 3_ 개새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진 모르겠지만, 우리는 절대로 멀쩡히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 헛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 했어….’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내가 너를 대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조금 지나친 우정일거라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너를 보며 느껴지는 어지러운 감정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심박 수, 아무리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는 너의 잔상.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닐 거라고 말이야.

이렇게 외면해 버리면.
너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개새끼 06
sambackwon.





“너‥ 보는데.”

복도는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기운으로 서늘했다. 살며시 시선을 올린 녀석의 눈도 날씨만큼이나 서늘했다. 이름이 뭐였지, 하고 나는 가물거리는 녀석의 이름을 더듬더듬 떠올리고 있었다. 1학년 때 자주는 아니지만 복도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아이였다. 하얗고 마른아이. 이태민은 눈 같았다.

애초에 그런 느낌이 있었다. 저 녀석과 친구가 될 거라고.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성격이고 습관이고 뭐 하나 닮은 것이 없었던 우리지만 울퉁불퉁 보기 싫게 튀어나온 서로의 모난 곳을 적당히 보듬으며 우리는 그런대로 주어진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었다. 즐거웠다. 이 전까지 다른 아이들과 지내며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즐거움이 언제나 내 곁을 감쌌다. 이태민이 특별한 탓도 있었지만, 품고 있던 내 마음이 자꾸만 특별해 지는 탓도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녀석과 함께 지낸지 막 1년이 조금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많이 예민해졌고, 그것이 녀석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심했다. 이태민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난 분명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심해져, 어느 순간 나는 녀석이 내 근처에 있기만 해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나는 그것이
‘좋아하는 감정’ 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태민이 나를 좋아하는 것과는 또 다른.
달라서 제법 원망스러운 그것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근처를 맴도는 것으로도 나는 내가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우리 둘을 포장해도 그러려니. 나는 내가 그따위로 멍청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열아홉이고. 또 내 옆에 있는 저 아이도 열아홉이고. 성인을 목전에 둔 사내자식이 좋아하는 감정을 품은 채로 그대로 순수할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나는 평범해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바보같이 말이다.


“야 이태민.”
“어?”

이태민의 턱 밑에 검은 먼지가 붙어있었다. 한 발짝 정도 앞서가는 녀석을 붙잡아 세우고 손을 뻗어 떼어내는데, 새하얀 녀석의 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목보다 조금 하얗고, 또 조금 얇을 뿐이지 거울로 수만 번은 봤던 내 목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묘해지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이성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양 옆에 줄다리기를 하듯 끈을 잡고 선 이태민이 땅이 파이도록 있는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 앞에 턱을 들고 가만히 서있는 녀석에게 미안해졌다. 그런데 검붉은 마음은 솜이 물을 먹듯 자꾸만 넓게 또 깊게 퍼져나갔다.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인터넷을 하던 이태민이 무심하게 그랬다. ‘야, 얘 게이래.’ 인터넷 창엔 얼굴이 제법 익숙한 헐리웃 스타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나는 괜스레 뜨끔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이태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인터넷에 열중했다. 문득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저 남자가 게이인 것에 대해 아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남자가 남잘 좋아해?”
“어?”
“그게 가능한가?”

좋고 싫고, 관심이 있고 없고 간에 녀석은 아예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이태민은 그렇게 맑은 얼굴로 그런 소리를 했다.

어떻게
그렇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를.


그래, 나도 조금 궁금해졌다.

어떻게 나는
그렇게 너를
좋아해 버렸는지.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바다에 갔던 날, 필름을 이태민으로 가득 채웠던 날. 나는 그저 또 너와의 추억을 새긴 것에 기뻤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한 순간에도 무심한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던 너였지만. 나는 또 평생을 가슴 속에 품고 닳고 닳아 희미해질 때 까지 꺼내볼 파랗고 시원한 기억이 하나 생긴 것이다.


너를 사진에 담았다. 그런데 나는 너를 담지 못 했다. 아무리 셔터를 누르고 저 바다를 내 필름 위에 그려 넣어도 드넓은 저 바다가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너를 아무리 담아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다시 퍼져나가 나는 너를 담을 수 없었다.

밤바다가 너를 덮칠 듯 다가오던 순간에,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밤바다는 그렇다. 한 없이 까매서 차마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이 너를 삼키면 나는 가뜩이나 까마득한 너를, 네가 품은 모든 생각들을 모두 알 수 없게 되어버릴 테니까. 나는 손을 뻗어 너를 붙잡았다. 그래도 멀리 가지마. 비록 멀리 있지만 더 이상은 멀리가지 마. 백번을 말해도 못 들을 내 속마음을, 나는 백번도 더 말한다. 더, 더, 더. 말 하고 말 하고, 되 뇌이고 되 뇌이고. 그래도 너는 모를 테지만…….







인화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진의 끝이 닳았다. 틈만 나면 서랍 속 고이 모셔둔 이태민의 사진을 꺼내보는 통에 사진은 가여운 내 순애보를 증명하듯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말았다. 사진 속 이태민은 걱정거리라고는 없는 듯 웃고 있었다. 평생 이 웃음만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이렇게만 웃어준다면. 나는 그대로도 좋다고. 결국 내가 다 망쳐버리는 꼴이 됐지만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일이 있고 그 다음날에. 서랍 속에 있던 이태민의 사진들은 모두 구겨졌다. 처참히 구겨져 내 방 쓰레기통을 맴돌다 결국 다시 서랍 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분명 후회를 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욕망이 부른 그 헛된 실수들을.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후회하고 자책하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나에 대한 분노와 그 끔찍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녀석에게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 선명했던 경계를 연하게 만들려고 아등바등했다. 욕심이 생겨서 였다. 마음이 자꾸만 커져서 바보 같은 나는 그 마음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나도 모르게 하나 둘씩 마치 짐을 내려놓듯이. 한 발짝, 또 한 발짝 너에게 다가가 계속 내 마음을 비추고, 나를 봐달라고 애원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나보다, 나보다도 먼저 죽어버리면 안 돼 너.”

친구를 잃은 이태민이 곁에 남은 친구에게 말했다.

말을 하는 이태민은 눈도 코도 모두 붉었다. 내가 그렇게 못된 줄은 몰랐는데, 이태민이 더욱 단단히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을 우정으로 못 박을 수 록 나는 더 요리조리 피하고 싶어졌다.

“그 대신 이태민 너 오래 살아야 돼. 난 오래 살고 싶으니까.”

겉으론 그런 척. 나도 너를 친구로 생각하는 척. 모든 것을 절절한 우정 속에 포장하고 덮고 감싸고.


친구라는 그럴싸한 방패막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태민을 걱정하고, 감싸고, 지켜주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그것들이 있어서. 나는 그래도 너의 곁에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었으니까.


“존나 소름 돋아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뭐, 아 끔찍한 소리 할 거면 하지 마라 너.”
“너랑 친구한 거 좀 다행인 것 같에. 좀 좋아.”


그런 소리를 들으면 네 친구로서 기뻐야 하는데 가슴이 욱신거리고 그랬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슬픔에 젖어 무너지는 이태민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어긋난 이태민의 행복한 일상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킬 수도 있었으니까. 친구를 잃은 슬픔에 주저앉은 너를 품에 안고, 온 마음으로 너를 위로할 수 있었으니까.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힘 낼 수 없겠지만 힘내라고. 무의미할 수 있는 말들을 두서없이 내뱉으며 그래도 가장 가까이서 너의 슬픔, 절망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나는 정말 나쁜 놈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이태민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나쁜 놈이니까, 그러니까 네가 가라고. 나는 갈 수 없으니 네가 가라고 말이다. 몇 번이고 입 밖으로 꺼낼 번했다.

“이태민”

앞서 걷는 이태민을 불러 세웠다. 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본다.


“..아니야.”
“왜.”
“아니라고.”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다시 꽁꽁 숨는다.
이태민이 또 시작이냐는 듯 짜증이 난 얼굴로 인상을 구겼다.

“할 말 있으면 해!”
“됐어.”

더 무슨 말이 들려오기 전에 먼저 걸음을 떼어 녀석을 앞질렀다.






“야 걔 있잖아 옆 반에.”
“누구?”
“이태민인가?”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가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낯익은 이름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소음으로 가득 찬 곳에서도 너의 이름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맨 뒤에 앉은 두 녀석이 너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아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귀를 기울였다.


“이태민? 걔 왜?”
“진짜 계집애 같지 않냐?”
“아 뭐 예쁘게 생기긴 했는데 건 왜?”
“아니. 그 새끼 좀. 아 좀 뭐라고 해야 되지? 게이? 같다고 해야 하나.”
“뭐래, 미쳤냐?”
“걔 지금까지 여친 한 번 안 사겨 봤데. 말이 되냐? 그 얼굴에?”
“그래서 뭐. 게이라고?”
“아니 뭐‥ 진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왜 걔랑 최민호랑 징그럽게 붙어 다니잖아 둘이~”
“헛소리 그만해라.”
“아 생각만 해도 더럽지 않냐?”


귀가 멍멍했다. 더 이상 눈을 깜박거릴 수가 없었다. 발끝에서부터 뭔가가 막 끓어오르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제대로 자각할 수 없었다. 그냥 미친 것 같았다. 더럽지 않느냐며 재수 없게 킥킥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빵! 하고 터져서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반쯤 열린 문을 활짝 열어 재끼며 반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기척을 느낀 두 녀석이 고개를 돌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함부로 입을 놀린 그 녀석의 멱살을 잡아끌고 무작정 복도로 끌고 나왔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처음부터 소란스러웠지만 어느새 모든 아이들의 관심은 녀석과 나에게로 향했고 나는 아랑곳 않고 녀석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태민을 모욕하고, 더럽히고, 짓밟은 죄였다. 그저 이렇게 맞아 마땅한 녀석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씨발‥! 함부로 지랄하지 마 병신새끼야!”

나는 악에 바쳐 소리쳤다. 주먹을 휘두르고, 방어를 하듯 나를 밀쳐내는 녀석의 손을 떨쳐버렸다.


이태민을 욕하지 마.

내 마음을 욕하지 마.


나는 나를 질책했다.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나는 그런 마음을 품은 나를 원망했다. 이태민을 욕보인 나를.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무리 속에서 이태민이 달려 나와 내 몸을 잡아끌었다. 흥분 할 대로 흥분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허공에 헛손질을 하다 겨우 끌려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이태민은 화가 났다. 멋대로 행동하는 나에게. 나도 화가 났다. 너를 모욕한 나에게.


“시기가 어느 땐데. 싸우긴 왜 싸워, 애도 아니고.”

그리고 바보같이 화가 났다. 내 마음을 조금도 몰라주는 너에게. 꽁꽁 숨긴 주제에 네가 알아주기를 바랐다는 듯이.


“하지 마.”
“뭘 하지마야. 너 피난다. 양호실 가서‥”
“만지지 말라고!”

나에게로 향하는 너의 손을 신경질 적으로 쳐내면서. 나는 계속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마음도 눈동자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하염없이 흔들렸고 그렇게 나는 이성을 놓았다.


가녀린 너의 팔목을 부여잡고 무작정 창고 안으로 너를 끌고 들어갔다. 쾌쾌한 먼지로 가득한 어두운 구석에 너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벽에 등을 부딪친 네가 단발의 비명을 지르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미쳤어 너?!”

그래, 나는 미쳐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이태민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떨리는 두 눈이 무언갈 말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해, 나는 끝끝내 듣지 못했다. 어깨에 올라온 이태민의 손을 잡아, 끌어 내렸다. 여전히 너의 눈은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이태민.”
“..어?”
“이태민‥”
“…….”
“씨발….”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이렇게 까지 상황을 끌고 온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로 울고 싶었다. 너를 원망하고, 나를 원망하다 지친 최민호는 그대로 울고 싶었다. 나약한 아이처럼. 눈이 붉어지고 코가 붉어질 때 까지.


나는 무작정 너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때 까지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했다. 몸이 이끄는 대로 너를 끌고 와 그대로 너를 쓰러트렸다. 겁에 질린 이태민의 얼굴을 뻔히 보면서도‥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태민을 그대로 느끼면서도‥


몸부림치는 이태민의 와이셔츠를 억지로 끌렀다. 거친 손길에 단추 몇 개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귓가로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너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마아‥!”
‘미안해.’

너의 맨살이 들어났다. 겁에 질려 하얀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하얀 건지 이태민의 속살은 백옥처럼 하얬다. 녀석의 맨 몸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온 몸이 달아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그만 해 제발!”
‘미안해.’

이태민의 교복 바지 버클을 끌어 내렸다. 소리를 지르던 이태민의 목은 쉬어있었다. 그래도 계속 소리쳤다. 나는 모두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쳐있었다. 그리고 나는. 말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너에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내 손이 이태민의 속옷 끝을 붙잡았을 때. 내가 힘이라도 주면 당장이라도 벗겨질 수 있었던 그 순간에. 나는 이태민의 눈물을 봤다. 붉어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씩 정신이 되돌아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 이태민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손은 멈추었다. 하지만 이태민의 눈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래 나는 분명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오고서야 알았다. 후회해도 늦었다는 걸. 나는 아주‥ 아주‥


“씨발‥”

이태민은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나를 밀어내는 손에 나는 가볍게 밀쳐져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멍하게 입을 벌리고 앉아 나는 그냥 병신처럼 그렇게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하아. 최민호.”
“…….”
“나는, 나는.. 씨발”
“…….”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 했어….”


나도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 했어. 아주 예전에 말이야. 정말로 나는 네가 친구인 줄만 알았어. 그냥 거기서 끝인 줄 알았어.


내려간 바지를 끌어올리고 제대로 잠기지 않는 와이셔츠를 끌어올린 너는 몇 번을 훌쩍이다 그대로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제야 입밖으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그제서야. 때늦은 후회와 사과가.


“미안.”

미안해.



모든 것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후회로 칠하고 또 칠하고. 온갖 덧칠에 더럽혀진 내 마음은 이제 구겨지고 찢겨지고 무너졌다. 이제 이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형체를 잃었다. 그래도 억지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품에 끌어안는 것은 다시금 머리에, 가슴에, 눈에 아른거리는 너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미련하고, 멍청하고, 한심하다.

더 이상 멀어지지 말라고 애원해놓고, 내가 억지로 저 멀리 밀쳐버린 것이다.

나는 정말 미련하고, 멍청하고, 한심하다.

혼자서 무슨 가슴 절절한 사랑에라도 빠진 냥 청승을 떨었던 주제에

한 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해 너와 나에게 상처를 안긴


나는 정말.

정말.


정말로.



미련하고, 멍청하고, 한심한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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